본문 바로가기
생활정보

6.10만세운동 일어난 장소, 전개과정.

by ↗↟⇈∳⊕⌖ 2020. 6. 8.
반응형

일제 강점기 3대 만세운동

1919년 3.1운동

1926년 6.10만세운동

1929년 광주학생운동

입니다.

19266.10만세운동은 학생운동을 일으켰던 대표적인 1920년대 사건입니다.

 

▷ 전개과정

조선왕조의 마지막 임금이자 대한제국의 황제였던 순종,

대한제국이 일제의 무력 앞에 종언을 고하면서 황제에서 왕으로 강등되었고,

창덕궁에 거처하면서 망국의 한을 달래다 세상을 떠나셨습니다(1926426).

 

일제의 문화통치시기에 사회주의 이념이 유행하였고, 당시에 운동은 사회주의의 영향을 많이 받았습니다.

6.10만세운동은 사회주의 세력(조선공산당)이 기획하고 계획하였고, 민족주의 진영(천도교)도 준비 과정에서 지원을 하였으며, 학생단체도 준비에 참여하였습니다.

이는 좌우합작의 계기를 마련해주는 역할을 하였으며, 민족 유일당 운동의 공감대가 형성되었고, 1927년 신간회 창립에 영향을 주었습니다.

이러한 6.10만세운동의 준비과정에서 일제에게 사회주의 세력과 천도교 측이 발각되었으나, 학생 단체는 발각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사직동계로 불리던 조선학생과학연구외와 통동계로 불리던 중앙고보 학생들에 의해 주도되었습니다.

 

1926610, 순종의 인산일(왕의 시신을 상여에 옮기고 준비된 릉으로 운구하는 날),

장안의 많은 백성이 비통한 마음으로 돈화문 앞으로 몰려들었습니다.

전국에서 망곡단, 봉도단이 만들어져 순종의 죽음을 애도했고,

학생들은 동맹휴교하였으며,

장례가 지나는 길가에는 30만명 남짓한 군중이 모였습니다.

일본은 조선총독부 산하 전경찰과 일본군 5000여명을 동원하여 철저한 감시 및 통제를 하였습니다.

그러나 24,000여 명의 학생들은 돈화문에서 홍릉까지 도열하였습니다.

 

학생들을 주축으로 610만세운동이 불붙게 되었고,

6.10만세운동은 순종의 장례행렬을 따라 8곳에서 일어났습니다.

을지로, 청계천, 훈련원, 신설동, 청량리, 순종이 묻혔던 유릉에 이르기까지 시위가 이어진 것입니다.

 

1. 오전 830, 순종의 상여가 종로를 지나자 지금의 종로 3가 단성사(최초의 영화관) 앞에서 가장 먼저 독립만세 선창으로 610만세운동 시작. 중앙고보생 이선호의 독립만세를 외치자 당시 300여 명의 학생들이 독립만세를 외치고 태극기를 휘날림. 당시 군중들도 따라서 호응을 함. 단성사 앞에서 40~50명의 학생 연행됨. 시위는 계속됨.

 

2. 845분경 청계천 3가 관수교 부근에서 연희전문학생 50여 명이 만세시위를 주도하였고, 일본 기마경관대와 충돌부상자 속출. 40명 연행.

 

3. 오전 930분경 을지로 경성사범학교 부근에서 만세 시위

 

4. 오후 1시경 훈련원(을지로5) 부근에서 만세 시위

 

5. 오후 130분경 순종의 상여가 도착할 즈음 동대문 근처에서 대기하던 연희전문대, 중동고보학생들은 독립만세를 외침

 

6. 오후 2시신설동 부근에서 만세 시위

 

7. 오후 220분경 동묘 부근에서 만세 시위

 

8. 유릉까지 만세소리가 이어짐.

 

당시 6.10만세 운동은 일제의 폭행으로 약 160명의 중경상자가 발생하였으며

 

서울에서만 학생 210여명이 체포되었고, 전국적으로는 1000여명의 학생 체포되었습니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