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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년 6월 민주항쟁(6.10 민주항쟁) 과정 일지(연표)

by ↗↟⇈∳⊕⌖ 2020. 6.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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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민주항쟁은 1987년 1월 14일 박종철 군이 고문으로 사망한 사건을 계기로

6월 29일 노태우의 ‘6‧29선언’ 발표까지 전국적으로 벌어진 반독재, 민주화운동입니다.

1987년 6월 민주항쟁(6.10 민주항쟁)

6월 민주항쟁은 6월 항쟁, 6.10 민주항쟁, 6월 민주화운동, 6월 민중항쟁 등으로 불리기도 합니다.

 

이번 글은 1987년 6월 민주항쟁(6.10 민주항쟁)의 과정의 개요를 소개하고,

그 아래로 1987년 6월 민주항쟁(6.10 민주항쟁)자세한 과정의 일지(연표)를 소개하였습니다.

 

6월 민주항쟁 과정 일지 개요

1987. 1. 14.  서울대 박종철 군, 경찰의 고문으로 사망

1987. 1. 20.  박종철 군 추모제 거행

1987. 2. 7.  박종철 군 범국민추도식 개최(2.7추모대회)

1987. 3. 3.  전국 각지 대규모 거리시위

1987. 4. 13. 전두환, 호헌조치 발표

1987. 4. 19.  ‘33평화대행진이후 처음으로 가두시위를 벌임

1987. 5. 18.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 ‘박종철 군, 고문치사사건은폐, 조작 성명 발표

1987. 6. 9.  연세대 이한열 군, 시위 중 최루탄에 맞아 부상 (7월 5일 사망)

1987. 6. 10.  ‘고문 살인 은폐 규탄 및 호헌 철폐 국민대회’(6·10대회) 개최. 1987년 6월 민주화 대항쟁 시작.

1987. 6. 12.  회사원, 시민 등 넥타이부대 등장

1987. 6. 26.  민주헌법 쟁취를 위한 국민평화대행진

1987. 6. 29.  직선제 개헌을 골자로 하는 ‘6‧29선언’ 발표

 

 

아래는 여러 자료를 참고하여 6월 민주항쟁 과정 일지(연표)를 정리한 것입니다.


1987년 1월

1987. 1. 13. 박종철 군 연행

서울대학교 언어학과 3학년에 다니던 박종철은 하숙집에서 자정 쯤에 치안본부 대공분실 수사관 6명에게 연행됨.

연행된 다음 날인

1987. 1. 14. 오전 서울대 박종철 군, 경찰의 고문으로 사망

박종철 군의 선배인 박종운을 잡기위해 박종철 군을 연행하였고, 박종운의 소재를 물으며 박종철 군에게 전기고문, 물고문 등을 하였으며, 연행된 지 하루도 안 된 1월 14일 오전에 결국 고문으로 사망.

박종철 군은 치안본부 대공수사단 남영동 분실 509호에서 고문 도중 욕조에 목이 눌리면서 질식하였음, 오전 1145분 경 중앙대학교 용산병원으로 옮겼으나 의사가 검진했을 당시 이미 숨져있었음.

이 날 경찰은 시신을 화장하여 은폐하려 하였으나 검찰이 사체보존명령을 내렸고,

 

사망 다음 날인

1987. 1. 15. 부검 실시

오후 6시가 넘어서 한양대 병원에서 부검이 실시 됨.

 

박종철 군 사망 2일 뒤인

1987. 1. 16. 책상을 치니 하고 죽었다.”

강민창 내무부 치안본부장과 박처원 치안감이 기자회견을 열어 책상을 치니 소리를 지르면서 쓰러져 중앙대 부속병원으로 옮겼으나 12시경 사망하였다.”고 발표

 

박종철 군 사망 3일 뒤인

1987. 1. 19. 가혹행위 시인, 사건 축소. ‘박종철군 국민추도회 준비위원회발족.

강민창 치안본부장을 다시 기자회견을 열고 가혹행위로 인한 사망을 시인하였고, 고문 경찰관 2명을 구속하면서 사건을 축소하였음.

함석헌, 홍남순, 김영삼, 김대중 등 전국에서 가계대표 9,782명으로 박종철군 국민추도회 준비위원회발족.

 

박종철 군 사망 5일 뒤인

1987. 1. 20. 박종철 군 추모제 거행

서울대학교 학생회관 2층에서 박종철 군의 추모제 거행. 침묵시위를 벌임

 

1987. 1. 24.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 [고문살인의 종식을 위한 우리의 선언] 발표

우리는 819월 이른바, ‘민학련, 민노련 사건으로 남영동 치안본부 대공분실에 끌려간 관련자들은 공산주의자임을 허위자백토록 물고문, 전기고문 등 모진 고문을 당했습니다.……
뒤이은 부산 미문화원 방화사건관련자들에 대한 고문, 859월 역시 치안본부 대공분실에서 20여일동안 민주화운동청년연합의장 김근태씨가 전기고문, 물고문, 고춧가루물먹이기 등 살인적인 고문을 당했습니다.
정신이상까지 일으켜야 했던 민청련 이을호씨에 대한 고문, 허인회군등 삼민투 관련자들에 대한 고문, 해를 바꿔 86년 송파보안사에서 당한 김문수씨 등 서울노동운동연합 관련자들에 대한 고문, 그리고 부천경찰서 성고문사건 등 크고 작은 고문사건들이 꼬리를 물고 일어났습니다.
그러나 빗발치는 가족들의 항의와 종교단체 및 재야단체의 진상규명 요청에도 불구하고, 정부당국은 항상 고문 사실은 있지도 않았고, 있어서도 안된다고 강변해 왔습니다.
이번 박종철군의 죽음은 그동안 한번도 밝혀지지 않았던 고문의 실체가 무엇인지, 수없이 되풀이 된 불법연행자 가족들의 호소가 얼마나 진실된 것인지를 극명하게 밝혀 주고 있습니다.

 

1987. 1. 26. 명동성당에서 박종철 군 추도 및 고문 근절을 위한 인건회복 미사거행.

김수환 추기경 강론

야훼 하느님께서 동생 아벨을 죽인 카인에게 네 아우 아벨은 어디 있느냐하고 물으시니 카인은 제가 아우를 지키는 사람입니까하고 잡아떼며 모른다고 대답합니다.

창세기의 이 물음이 오늘 우리에게도 던져지고 있습니다.

너의 아들, 너의 제자, 너의 젊은이, 너의 국민의 한사람인 박종철은 어디있느냐하고 물으니 탁 하고 책상을 치자, 억 하고 쓰러졌으니 나는 모릅니다”, “수사관들의 의욕이 지나쳐서 그렇게 되었는데 그 까짓 것 가지고 뭘 그러십니까”, “국가를 위해 일하다 보면 실수로 희생될 수도 있는 것 아닙니까”, “그것은 고문 경찰관 두 사람이 한 일이니 우리는 모르는 일입니하고 잡아떼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카인의 대답입니다.

박 군을 고문치사케 한 수사관은 물론이요, 그 밖의 경우에도 고문을 한 모든 수사관들, 그들의 일을 잘 알면서도 승인 내지 묵인한 상급자들, 공권력을 행사하는 모든 이와 위정자들 그리고 이런 사실이 우리나라 안에 있다는 것을 거듭 들으면서도 지금까지 남의 일처럼 무관심했던 우리 모두가 도스토예프스키의 죄와벌에 나오는 로디옹처럼 큰 네거리에 가서 사방 온 세상을 향하여 곧 모든 것을 아시고, 공의로우시면서도 자비로우신 하느님께 우리는 살인죄를 범하였습니다. 우리는 살인죄를 범하였습니다라고 소리치며 진심으로 참회의 눈물을 흘려야 합니다. 오늘 우리의 가슴에 이런 참회와 속죄의 눈물이 흐를 때 그리고 하느님의 용서가 있을때, 우리와 우리 사회는 비로소 구원될 수 있습니다. 이때 비로소 우리는 참으로 새사람으로 태어나고, 우리 사회와 나라도 새롭게 태어날 수 있을것입니다.

이 정권의 뿌리에 양심과 도덕이 도대체 있느냐, 아니면 총칼의 힘뿐이냐 하는 회의가 근본적으로 야기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것은 다시 국민인 우리에게 이런 정권을 그대로 따라야 하는지 아닌지에 대한 중대한 양심문제를 던지고 있습니다. 이제 박종철 군의 희생이 우리의 정의로운 민주회복의 도정에 승리의 분기점이 되고, 저력이 되어 줄 수 있기를 하느님께 간절히 기원합니다.


1987년 2월

1987. 2. 3. 한신대학교 교수단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에 즈음한 우리의 견해] 성명 발표

우리 한신대학 교수 일동은 진심으로 이번 박종철 군 사건을 계기로 삼아 국민들은 인간의 인간됨과 인간의 존엄성이 보장되는 새로운 민주정권을 창출하려는 범국민적 운동으로, 권력자는 권력의 출발점과 속성을 뼈아프게 반성하며 역사적 전환을 준비하는 출발점으로 삼을 것을 촉구한다.

 

날짜 확인 안 됨.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는 시국대책위원회 성명 발표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는 시국대책위원회 이름으로 박 군을 애도하고, 고문을 추방하자는 일에 여야, 재야, 종파, 교파, 남녀노소가 따로 나뉠 수 없고, 이 일에 반대하는 자가 있다면 하느님과 역사의 심판을 면할 수 없을 것이라는 내용의 성명을 발표

 

1987. 2. 4.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 내부공한을 통해 추도회 참가 당부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은 내부공한을 통해, “명동성당 측이 장소사용을 불허했다는 당국의 발표가 거짓임을 밝힘.

전국의 사제들로 하여금 전국 각지에서 개최되는 추도회에 참가해 줄 것을 당부

추도회에 참가할 수 없는 경우 모든 성당은 27일 오후 2시 정각 타종하고, 신자들은 1분간 묵념하고, 자동차를 타고 있는 사람은 경적을 울리도록 권고하여 달라고 호소.

추도회가 끝난 뒤에도 박 군을 기리고 고문종식을 염원하는 뜻으로 2월 한 달 동안 모든 신자들이 검은 리본을 달도록 권고하여 달라고 당부

민주제단에 바쳐진 젊은이의 이 고귀한 희생이 결코 헛되지 않도록 우리를 깨어 있게 하시고, 우리 모두 자유와 진리를 위해 목숨을 바치는 주님의 충실한 사도되게 하소서”(정의평화위원회 기도문)

 

1987. 2. 7. 박종철 군 범국민추도식 개최(2.7추모대회)

각계인사 6만 명으로 준비위원이 구성되어 서울 등 전국 16개 지역에서 박종철 군 범국민추도식 개최(2.7추모대회)

오후 2시 정각 명동성당에서 박종철의 나이와 같은 스물한 번의 종이 울림.

수백대의 자동차가 경적을 울림.

전국에서 798명 연행 됨.


1987년 3월

1987. 3. 3. 전국 각지 대규모 거리시위

박종철 군 49재를 맞아 불교계 단체들이 [고 박종철 영가 49재 봉행준비위원회]결성하고 조계사에서 재를 지내기로 함.

[고 박종철 군 국민추도회]는 파고다공원에서 고문추방 민주화 국민평화대행진을 개최하기로 함.

그러나 경찰의 원천봉쇄로 저지되었고, 이에 전국 각지에서 대규모 거리시위를 벌였으며, 439명이 연행됨.

전국 46개 대학의 학생들이 공권력의 부당한 행위를 규탄하는 집회와 시위를 벌임.

공권력의 통제로 박종철 군의 영정이 있는 부산 사리암에서만 고 박종철 군의 49재 거행됨.

 

2월 7일 추도회와 3월 3일 49재는 전국에서 동시다발로 이루어졌으며, 다수의 시민들이 동참했다는 점에서 6월 항쟁의 전초전이자 예고편의 의미를 지님.


1987년 4월

1987. 4. 13 전두환, 호헌조치 발표

전두환, 특별담화를 통해 `개헌논의 유보` 성명, `현행헌법으로 정부이양`, `대통령 선거 연내 실시` 발표

19852.12 총선 이후 야당과 재야세력은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주장함

19862월 대통령 직선제를 중점으로 하는 민주헌법쟁취투쟁 확산. 신한미주당이 1,000만 개헌 서명운동 돌입

1986730일 여야 만장일치로 헌법개정특별위원회 발족.

1987년 박종철 군 사망사건으로 국민들의 민주화 요구 거세짐. 대통령 직선제 개헌 논의 활발하게 이루어짐.

1987년 4월 13일 정권유지에 불안을 느낀 전두환이 모든 개헌 논의를 금지하는 조치 단행(4.13호헌조치(護憲措置))

호헌(護憲) : 헌법을 보호함

 

1987. 4. 14.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와 김수환 추기경, 4·3조치 비난.

김수환 추기경 부활메세지 발표

태양이 구름에 가려 빛나지 않을지라도 나는 태양이 있음을 믿습니다. 사랑이라곤 조금도 느껴지지 않을지라도 나는 사랑을 믿습니다. 하느님께서 침묵 속에 계시더라도 나는 하느님을 믿습니다.

국민은 있어도 주권은 없고,
신문·방송은 있어도 언론은 없으며,
국회나 정당은 이름뿐이요,
힘만이 있고 정치는 없는 공허 속에서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국민의 여망인 민주화가 정략의 도구로 쓰여지고,
보다 밝은 정치의 새시대를 열 것으로 기대되었던 헌법개정의 꿈은 기만과 당리의 술수아래 무참히 깨어졌습니다.
마지막 순간까지 우리는 통치권자의 마음을 비운 결단을 기대하였지만,
막상 내려진 이른바 ‘고뇌에 찬 결단’은 한마디로 말해서 국민에게는 슬픔을 안겨 주었고,
생각하는 이들의 마음은 더 큰 고뇌로 가득 차게 되었습니다.
이 땅위에는 다시금 최루탄이 그칠 줄 모르고 터지며,
국민의 눈과 마음 속 깊은 곳에는 눈물이 마를 날이 없게 되었습니다.”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민통련)전 국민이 힘 모아 장기집권 분쇄하자는 제목의 성명을 발표

 

1987. 4. 18. 민주언론운동협의회 등 공동성명

민주언론운동협의회, 민주교육실천협의회, 한국출판문화운동협의회, 민족미술협의회, 자유실천문인협의회, 민중문화운동협의회 공동성명 전 국민의 힘으로 호헌획책 분쇄하고, 장기집권 저지하자!

김수환 추기경 부활전야미사 강론

이제 우리의 정치, 사회현실은 민주화와는 거리가 먼 전제시대가 시작되고 인간기본권과 언론자유의 폭은 더욱 좁아질 것이며, 이 어둠이 언제까지 지속될지 예견하기 힘들게 되고야 말았습니다.”

1987. 4. 19.(부활절) ‘3ㆍ3평화대행진’ 이후 처음으로 가두시위를 벌임

‘419공원묘지에서는 민통련 비롯해 26개의 재야 및 사회단체 그리고 대학생이 참가한 가운데 제27주기 기념식이 열렸으며, ‘33평화대행진이후 처음으로 가두시위를 벌였음.

경찰은 수천 명을 동원하여 집회와 시위를 해산시켰으며, 358명을 연행함.

 

1987. 4. 21. 천주교 사제들 단식 돌입

천주교 광주교구 사제들이 호헌조치 반대하며 단식 돌입. 이후 전주, 서울, 안동, 원주, 인천, 마산, 부산, 대전, 수원, 춘천 등 14개 교구로 확대

직선제 개헌을 위한 단식기도를 드리며라는 성명

4.13특별담화는 현행 헌법에 의한 차기 대통령선출을 전제로 하는 것이기에 유신 이래 독재권력에 의해 빼앗긴 정부를 선택할 국민의 권리를 되찾자는 민의를 배신하는 것입니다.
평화와 자유의 대전제인 서울올림픽이 현 독재체제의 유지의 근거가 도저히 될 수가 없습니다.
자유와 정의를 사랑하는 모든 사람들은 우리 국민이 군사독재의 질곡에서 해방되어 국민의 광범위한 지지와 선택으로 탄생된 정부에 의해 국민의 축복 속에 서울올림픽이 치루어 지기를 바랄 것입니다. ……
우리는 김수환 추기경이 부활절 메시지에서 현실의 정치가 아무리 허망하고 사회의 모든 현상이 아무리 어두워 보여도 우리가 실망하지 않고, 진리와 정의 및 사랑의 불을 지피며 살면 주님은 억압된 민중의 짓밟힌 인간성을 반드시 살려 주실 것입니다.”라고 밝히신 믿음을 함께 하면서 ……
단식기도를 드리기로 하였습니다.
단식기도 중 우리는 아래와 같은 우리의 기도지향이 진리와 공의의 원천이시며 역사의 주관자이신 하느님께 가납되기를 바랍니다.
이 나라의민주화를 염원하는 여러분들께도 저희들의 기도에 함께 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1. ‘동장에서 대통령까지 우리들의 손으로유신 이래 빼앗긴 정부를 선택할 국민의 권리회복을 위해,…… 4. 집권시와 집권 이래 자행한 모든 죄과를 속죄할 수 있는 현 집권세력의 명예로운 퇴진을 위해

 

1987. 4. 22. 고려대 교수 시국선언문 발표

여성단체연합회에 이어 함석헌, 박형규, 계훈제 등 종교·문화·여성계의 지도적 인사들 27명이 연명으로 민주개헌 관철을 위한 국민운동을 제창하면서 농성에 돌입

고려대 교수 30,‘4·13호헌조치에 반대하는 내용의 시국선언문 발표

 

1987. 4. 29. 서강대 교수 성명 발표

서강대 교수 28명이 연명으로 …… 개헌유보조치는 철회되어야 한다. 개헌은 우리 사회의 민주화를 위한 디딤돌이므로 여야가 국민여망에 부응하여 개헌에 대한 논의와 대화를 계속해야 한다는 내용의 성명을 발표


1987년 5월

1987. 5. 17. 함세웅 신부 박종철 군, 고문치사사건은폐, 조작 성명 발표 부탁

김승훈 신부는 함세웅 신부로부터 518일 미사에서 박종철 군, 고문치사사건은폐, 조작 성명을 발표해 달라는 부탁을 정식으로 받음.

 

1987. 5. 18. 김승훈 신부 ‘박종철 군, 고문치사사건’ 은폐, 조작 성명 발표

전국 62개 대학에서 22천여 명이 추모집회 또는 시위를 함.

김수환 추기경은 광주민주항쟁 제7주기 미사의 강론에서 1980년 광주의 아픔과 박종철 군의 죽음 애도.

명동성당에서 열린 광주항쟁 7주년 기념 추모미사를 마친 후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 김승훈 신부가 ‘박종철 군, 고문치사사건’ 은폐, 조작 성명 발표

 

1987. 5. 21. 박종철 군 사망 관련 범인이 박처원 등 3명 더 있음을 인정

정구영 서울지검 검사장이 기자회견을 하여 범인 3(박처원, 유정방, 박원택)이 더 있다는 사실을 인정함.

 

1987. 5. 23. 610고문살인 은폐규탄 및 호헌철폐 국민대회를 개최하기로 함

기독교회관에서 재야인사 등 134명은 박종철 고문살인은폐조작규탄 범국민대회 준비위원회를 결성하고 610일 오후 6시 성공회 대성당에서 고문살인 은폐규탄 및 호헌철폐 국민대회를 개최하기로 함

 

1987. 5. 27.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국본)' 발대

민주당·종교계·재야단체 등 발기인 2191,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국본)' 발대식 거행하고 4·13 조치 철회 및 직선제개헌 공동쟁취 선언

 

1987. 5. 29. ‘호헌 철폐와 민주개헌 쟁취를 위한 서울지역학생협의회구성.

서울대 등 8개 대학 특별위원회의 결집체로 호헌 철폐와 민주개헌 쟁취를 위한 서울지역학생협의회구성.


1987년 6월

1987. 6. 2. 전두환은 노태우를 자신의 뒤를 잇는 대통령 후보로 추천

1987. 6. 3. 민정당 중앙집행위원회는 노대우를 대통령 후보로 공식 제청.

1987. 6. 5. 6·10대회 참가 독려 시작.

서울지역대학생대표자협의회(서대협) 소속 13개 대학 총학생회 간부 20여 명, 각 대학총학생회실에서호헌 철폐와 군부독재 종식을 위한 단식농성에 돌입.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국본)6·10국민대회에 즈음하여 국민에게 드리는 말씀을 통하여 당일 참여하는 시민이 지켜야 할 ‘6·10대회 행동요강을 발표.

이로부터 본부를 비롯한 각 지부, 부문별 조직이 전단을 대량 제작해 6·10대회 참가를 독려하기 시작.

 

1987. 6. 9. 연세대 이한열 군, 시위 중 직격 최루탄에 맞아 부상 (7월 5일 사망)

1987. 6. 10.

국본, ‘고문 살인 은폐 규탄 및 호헌 철폐 국민대회’(6·10대회) 개최.

 

1987년 6월 민주화 대항쟁 시작.


오전

민정당은 잠실체육관에서 전당대회를 열고 노태우를 차기 대통령 후보로 선출함.

같은 시각에 열린 민주당과 민주화추진협의회(민추협)영구집권음모 규탄대회에서 김영삼 총재는 지금 이 시간 민정당은 4천만 국민의 뜻을 무시한 채 역사 속의 치욕스럽고 부끄러운 돌아올 수 없는 다리를 건너고 있다고 비난하면서 “4·13조치의 계속과 일방적인 정치일정의 강행은 이 정권의 비극이고, 불행이라고 경고


정오

성공회 대성당에서 마흔두 번(분단과 독재의 세월을 의미하는 숫자)의 종이 울림.

성공회 대성당에 어렵게 진입한 일부의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 집행부의 대국민 성명이 스피커를 통해 발표 됨

“국민여러분, 우리는 민주주의를 사랑하는 온 국민의 이름으로 지금 이 시각 진행되고 있는 민정당 대통령 후보 지명대회가 무효임을 선언합니다”

성공회 대성당에 진입하지 못한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 집행부는 기독교회관에서 국민에게 드리는 선언문’을 낭독함.

오늘 우리는 전 세계 이목이 주시하는 가운데 40년 독재를 청산하고 희망찬 민주국가를 건설하기 위한 거보를 국민과 함께 내딛는다.
국가의 미래요, 소망인 꽃다운 젊은이를 야만적 고문으로 죽여 놓고 그것도 모자라 뻔뻔스럽게 국민을 속이려 했던 현 정권에게 국민의 분노가 무엇인지 분명히 보여주고 국민적 여망인 개헌을 일방적으로 파기한 4·13폭거를 철회시키기 위한 민주장정을 시작한다. ……
세계의 양심과 이성이 우리를 격려하고 민주제단에 피뿌린 영령들이 우리를 향도하며 민주화 의지로 사기충천한 온 국민의 결의가 큰 강줄기를 형성하니 무엇이 두려운가.
자! 이제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찬연한 민주새벽의 그날을 앞당기자. ……”

시민의 참여를 막기위해 모든 관공서는 국기 하강식 생략.

도심을 지나는 지하철은 시청, 광화문, 종로 일대의 역을 정하차지 않음.


저녁 6시 정각

서울 도심은 애국가 소리에 파묻힘.

성공회 대성당 구내에 있던 차량들이 경적을 울리는 것을 신호로 도심을 지나던 차량들도 함께 경적을 울림.

학생들이 ‘호헌철폐’, 독재타도‘를 위치자 시민들이 참여하기 시작하여 인파는 걷잡을 수 없이 늘어남.

전국 22개 도시, 5백 14곳에서 연인원 50여만 명이 참가한 가운데 시위 전개.

경찰은 전국에서 3831명 연행

밤이 되자 최루탄에 쫓기던 시위대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명동성당으로 향했고, 이로부터 6월 민주항쟁의 기폭제가 된 5일간(6월 15일까지)의 명동성당 농송투쟁이 시작됨.

 

1987. 6. 11. 명동과 신세계 앞 및 남대문시장 등 도심곳곳에서 시위.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는 우리의 뜻인 호헌반대, 우리의 방법인 평화운동 그리고 결코 꺾일 수도, 막을 수도 없는 국민의 힘을 보여 주었다6·10국민대회를 마치며담화문을 발표함.

서울대생 500여 명·한국외국어대생 1,000여 명·서울시립대생·경희대생·한양대생 등, 명동과 신세계 앞 및 남대문시장 등 도심곳곳에서 시위.

전주지역 변호사회·전남지역 약사회, 4·13조치 철회와 합의 개헌을 요구하며 성명.

6·10 대회 주도한 재야·종교인 중 오충일목사 등 11명 연행됨.

 

1987. 6. 12 회사원, 시민 등 넥타이부대 등장

6·10 집회와 관련하여 양순식 민주당 부총재 등 13명을 구속. 시위 현장에서 연행된3,854명 중 123명 구속.

명동성당 주변에서 점심식사길의 회사원·시민 등 1000여 명이 '호헌철폐'를 외치며 시위.

오후 2시경 연세대생 3000여 명 '살인적 최루탄 난사에 대한 범 연세인 규탄대회' 개최 후 학교 앞 도로점거 연좌시위.

부산 부산지역총학생회협의회 소속 대학생 1500여 명 부산 수산대에서 연합집회 개최후 투석, 화염병 투척 등 격렬시위

춘천 강원대생 1000여 명 교내 시위 후 횃불시위, 경찰과 투석전을 벌이다가 오후 1120분경 해산.

400여 명, 명동성당에서 3일째 철야농성.

 

1987. 6. 13. 계속된 도심 시위

명동성당 시위와 관련하여 11명 구속.

계속된 도심 시위로 647명 연행.

광주변호사회, 4·13호헌조치 철폐와 합의개헌을 요구하는 내용의 성명

부산 병영집체훈련 마치고 부산역에 도착한 수산대·산업대생들과 마중나온 학생들이 합세한 1000여 명, 역앞 8차선 도로 점거 연좌농성. 주변 1만여 시민, 박수로 환호

부산대에서 집회를 마친 학생 7000여 명 중 2000여 명이 경찰 저지선 돌파로 가두 진출, 사직동·고속버스터미널까지 진출.

대전 한남대생 1000여 명, 도서관 앞 집회 후 대치 중 동료학생의 최루탄 부상에 항의 200여 명 철야농성

 

1987. 6.15.

전국 45개 대학생 68,000, 격렬 시위. 910명을 현장에서 연행.

 

1987. 6.16.

국본 산하민주헌법 쟁취 국민운동 불교공동위원회결성.

전국 65개 대학생 및 시민 5만여 명(경찰추산) 도심 시위.

 

1987. 6.17.

서울 17개 대학생 시위.

부산·대전 1만여 명의 시민, 도심에서 심야 시위.

 

1987. 6.18. ‘최루탄 추방대회개최

국본, 전국 주요 도시에서최루탄 추방대회개최.

이한열이 직격 최루탄에 맞아 혼수상태에 빠진 것에 분노하고 독재정권의 초강경 시위 진압을 규탄하며 시위. 전국 16개 도시 247개소 150만 명이 참가.

노동자와 학생 1만여 명, 인천 숭의동 로타리에서 가두집회.

부산 택시 기사 100여 명, 10만여 명의 시위대 선두에서 경적 시위.

18일에 계엄령이 선포될 것이라는 소문이 돌았음.

 

1987. 6. 19.

광주 원각사, 45,000 명이 참가한 가운데 호헌 철폐 및 구속자 석방을 위한 법회개최

 

1987. 6. 20. 서울시내 중고 교사, 시국성명 발표

경찰의 원천봉쇄 속 종로1가 소재 조계사에서 `민주화를 위한 구국법회` 진행, 승려 70여 명과 신도 1백여 명이 법회 후 조계사 앞 큰 길로 시위행진.

명동 일대에서 수천 명의 시위대 경찰과 대치, 투석전 등 전개

부산 천주교 부산교구 정의평화위원회 사제단 위원장 박승원 신부, 가톨릭센터 내 학생농성과 관련 기자회견. 지하철 서면역 중심 시위 새벽 2시까지 산발 전개.

대구 6개대 학생 5000여 명이 대구 시내 곳곳에서 6일째 가두시위, 10시간 동안 격렬한 시위를 벌임. 달성파출소가 화염병에 전소된 것을 비롯, 4개 파출소가 불타거나 부서짐.

구로지역 노동자 200여 명, 가리봉동 시장에서 1,000여 명의 시민과 민주화 집회 후 가두 시위.

광주 7시 35분경, 중앙대교 앞에서 스크럼을 형성한 학생 중심의 500여 시위대에 주변 시민들 급속히 가세, 약 3만 명으로 증가하여 중앙로 앞까지 도로를 완전 장악. 7시 42분경, 중앙로-대성국로 사이 지역에 10만여 명 운집, 메가폰과 마이크를 사용하며 시위 계속. 9시경, 원호청-광주은행 사이 약 20만으로 추정되는 시민 운집.

춘천 강원대·한림대생 1000여 명이 밤 늦게까지 격렬한 가두 시위.

서울시내 51개 중고 교사 105명, 정치민주화와 교육민주화를 요구하는 내용의 시국성명 발표

 

1987. 6. 21. 해외 LA교민, 코리아타운에서 3시간 동안 개헌요구시위 및 집회 개최

오후 5시 기독교대한감리회 소속 신도 및 학생 2000여 명, 종교교회에서 `민주화를 위한 구국기도회`를 가진 뒤, 이 가운데 800여 명이 교회 밖으로 진출 1시간 동안 시위.

부산 0시를 기해 택시운행이 전면 중단

오후 4시부터 다음날 새벽 2시까지 학생과 일부 시민 5000여 명 부산시내 주요 간선도로 점거하고 반정부 가두 시위 계속.

오후 5시 부산지역총학생회협의회, 서면 로터리에서 '범시민궐기대회'를 가질 예정이었으나 경찰의 원천봉쇄로 저지되자, 이후 가두시위로 이어짐.

대구 대학생 중심의 1500여 명, 경북대 운동장에서 '2보 전진을 위한 애국학생 시민연합 대동제'를 개최

광주 새벽 1시경 공원쪽 시위대가 중앙로 시위대에 합류, 10만여 명 운집. 시내 곳곳에 대자보 붙고, 시국토론회 전개. 새벽 4시경, 호남동 천주교회 부근에서 시민들이 스스로 화염병 제작, 학생들은 비폭력을 주장했으나 시민들은 화염병 사용의 정당성을 주장함.

오후 1시경 고등학생 350여 명이 모여 광주지역 민민투 결성. 10시경 중앙로 쪽 시위대와 공원 부근 시위대가 선현교회 방면에서 합류, 1000여 명의 대열 형성. 이곳에서 처음으로 시민들이 제작한 화염병이 사용됨.

제주 제주대생 100여 명이 제주종합시장 앞 중앙로에 집결하여 경찰과 대치하는 등의 시위를 벌임.

해외 LA교민 1500여 명, 코리아타운에서 3시간 동안 개헌요구시위 및 집회 개최

 

1987. 6.22. 종교인 1,000여 명 철야농성에 돌입

종교인 1,500여 명, 새문안교회에서 구국 기도회 후호헌 철폐독재 타도를 외치며 연좌시위. 1,000여 명은 철야농성에 돌입.

 

1987. 6. 23. 광주 택시 기사들 라이트 켠 채 경적시위

서울지역 25개 대학생 2만여 명, 연세대 노천극장에서 `서울지역대학생대표자협의회(서대협)` 주최로 `호헌철폐와 독재종식을 위한 서울지역 청년학도 결의대회`를 갖고 6·26 국민평화대행진 적극 참여 결의.

부산 오후 3시 전후 부산대·동아대·부산산업대 등 1500여 명 학교별로 '가톨릭센터 농성 보고대회 및 가두출정식' 개최.

광주 3시경 신흥택시 기사들 라이트 켠 채 경적시위, 4시경 중앙로 4거리의 택시 시위대 도청쪽으로 이동, 1만여 명 택시 뒤에 쓰인 '독재타도' 뒤따라 가며 시위. 7시경 광주상고생 200여 명 '독재타도, 최루탄 추방' 구호 외치며 시위.

전주 6시경 민주화실천 이틀째를 맞아 1만여 명의 시민과 학생들 코아백화점 앞으로 운집, 8시경에 2만여 명의 시위대가 '시국토론회'를 개최. 기도회를 마친 4000여 명의 '촛불대행진' 행렬과 합세, 시위군중 4만 명으로 급증.

제주 제주대생 700여 명, 중앙로터리에서 가두시위 전개, 새벽 1시까지 지속.

성결교회 200여 명, 기도회 후 가두시위.

 

1987. 6. 24. 전두환, 김영삼 회담 개최, 결렬 선언

전두환, 김영삼 회담 개최되었으나 김영삼 민주당 총재 측에서 협상 결렬 선언.

제헌의원 이상돈 씨등 전·현직 의원 71, '극한 상황으로 치닫고 있는 현 시국에 대한 우리의 입장' 제하의 성명서를 통해 '호헌철폐와 독재타도', '시위 적극지지' 표명.

대학생과 노동자 700여 명, 영등포역과 영등포 시장 부근에서 2시간여 동안 산발 시위

부산 천주교 부산교구 사제단 소속 신부 80여 명, 가톨릭센터 농성해산자 집단 구타 사건에 항의. 가톨릭센터 7층에서 항의농성 돌입.

6·18 시위 현장에서 직격탄 맞아 입원중이던 회사원 이태춘 씨 사망.

대구 경북대·계명대·영남대·대구대 등 4개생, 9일만에 가두시위없이 교내집회만진행.

광주 새벽 0시경 서현교회 앞 횃불시위 주력 500여 명과 시민들 3000여 명, 12시경 고교생 100여 명의 집단적 참여로 시위대 2만여 명으로 증가, '4·13철회만이 아닌 군사독재 타도해야 한다'는 내용으로 시민토론회 개최.

전주 6시경, 시민·학생 2000여 명, '민주개헌과 민주정부수립을 위한 실천대회' 개최 이후, 시위대 1만여 명으로 늘어나 새벽까지 격렬 시위.

 

1987. 6. 25. 민주당 최루탄 제조 중지 촉구

민주당 최루탄조사대책특위 소속 의원 10여명, 최루탄 제조회사인 S화학을 방문, 최루탄 제조 중지 촉구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과 국민운동본부 참여 변호인단, '6·24여야영수회담'결과에 대해 공동성명 발표

서울대·경기대 등 150여 명, 구로동 코카콜라 공장 앞 4차선 도로 점거, 격렬시위, 불발 최루탄 터져 7명 부상 * 부산 부산시경, 6·10대회 이후 부산시내 시위 주도 학생, 재야인사 64명 긴급 검거령

진주 3시경 전북도내 7개 대학 6000여 명 전북대 '민주광장'에서 '전북지역대학생협의회' 결성 이후 가두 연좌시위

‘용성지역 호헌 철폐 및 군부독재 타도 학생협의회’공동의장 이재용, 경원대학교에서 다음날 집회 회의를 하던 중 경찰이 수배자검거를 위해 교내로 진입한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도피하던 중 경원대 앞에서 교통사고로 사망.

 

1987. 6. 26. 민주헌법 쟁취를 위한 국민평화대행진

6월민주항쟁의 마지막 대규모 집단 항거

민주헌법 쟁취 국민평화대행진. 전국 33개 시, 군, 읍에서 180만여 명이 시위에 참가.

대규모 경찰 병력이 동원되어 집회 예정지나 주요 관공서를 경비하고 검문검색을 했으며, 대학 학생회와 동아리 등을 수색

시민과 학생은 여기저기로 이동하면서 호헌 철폐독재 타도그리고 직선제 쟁취한열이를 살려내라등의 구호를 외쳤음.

고등학생들도 다수가 시위를 벌였고, 밤이 되자 노동자와 직장인도 시위에 동참했음. 국민평화대행진의 전개는 지역에 따라 다소 편차를 보였으나, 자정을 넘겨서까지 진행된 지역들도 있었음.

수원 북수동 성당에서 `나라와 민족을 위한 기도회`를 마친 신부·수녀와 7000여 명의 군중이 수원역으로 행진. 밤 11시 1만여 명의 시민이 수원역에서 집회, 남문시장 안 노점상 50여 명이 자체적 시위 벌이며 학생들에게 동참을 촉구.

성남 '성남지역 민주화연합(의장:이해학 목사)'이 '평화대행진' 선포, 3만여 시위대 평화행진, 자정 무렵 해산. 이후 시내곳곳에서 새벽 3시까지 산발적 시위 계속, 중앙파출소 점거. '노동3권 보장', '저임금 박살' 등의 구호 등장.

인천 경찰의 원천봉쇄 속에서도 1만여 명의 시민·노동자·학생들이 도로를 완전점거한 가운데 시위, 다음날 새벽 2시까지 지속, 부평로의 대중집회에서 '인천지역 민주노동자연맹'의 창립보고대회 개최.

안양 대학생·노동자 4000여 명이 오후 8시경부터 다음날 새벽 4시까지 철야 시위.

부산 오후 4시경 신부 70여 명, 수녀 700여 명과 신도 등 2500여 명이 중앙 성당에서 '민주화와 인권회복을 위한 특별미사' 거행. 미사후 가톨릭센터 앞까지 침묵시위. 이후 부산시내 전 지역에서 27일 새벽 2시까지 시위 지속.

마산 국민대회에 앞서 경찰책임자와 '무탄무석'을 약속한 후 촛불행진, 다음날 새벽까지 평화적인 시위가 계속됨.

대구 4만여 명의 시민이 참여 유신학원 네거리-반월당 네거리-명덕로터리-수도산 사이의 간선도로 등에서 27일 새벽 1시 30분까지 시위, 가장 격렬한 양상 전개.

대전 시내 중앙로, YMCA 앞 원동 4거리, 가톨릭 문화회관 앞, 선화교 등에서 연 인원 5만여 명이 참여한 가운데 오후 11시 20분경 까지 시위. 경찰은 오후 9시경부터 충남국민운동본부·대전인권위원회·충남민청의 전화를 불통시킴.

광주 6시경 원각사 앞, 5·18 유족회·국민운동전남본부 중심으로 2000여 명 시위. 7시경 한일은행 사거리 일대 10만여 명 운집 시위, 27일 새벽까지 산발시위 계속, 26일의 시위는 20~30만에 달하는 최대 규모의 시위.

전주 농민·학생·시민 등 2만여 명이 7시에 관철동 네거리를 점거 연좌,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전북본부' 주도하에 '민주헌법쟁취 전북도민평화대행진' 발대식을 갖고 10만으로 늘어난 시위대와 함께 서광중학교 앞까지 대행진을 강행.

춘천 명동 입구에서 개최하려던 '민주헌법쟁취 국민평화대행진'이 봉쇄되자 오후 11시20분까지 시내 곳곳에서 산발 시위.

민주화를 위한 전국교수협의회’(민교협), 창립대회를 개최하고자 했으나 경찰 저지로 무산.

 

1987. 6. 29 노태우 민정당대표위원, 직선제 개헌을 골자로 하는 ‘6‧29선언’ 발표

전두환 대통령과 사전 협의 하에 노태우 민정당 대표가 중앙집행위원회에서 대통령에게 건의하는 방식으로 발표

주요 내용은 조속한 시일 내 대통령직선제 개헌 실시, 대통령 선거법 개정, 김대중 사면·복권과 시국 사범 석방, 국민의 기본적 인권 신장, 언론기본법 개정과 언론의 자율성 최대 보장, 사회 각 부문의 자치와 자율 보장, 정당의 자유로운 활동 보장, 과감한 사회 정화 조치

 

국민운동본부 성명서 발표

노태우 민정당 대표위원이 제의한 대통령직선제 개헌 등 시국수습 6개 항의 발표를 보고, 우리 국민운동본부는 정부, 여당이 때늦은 감은 있으나 이제라도 국민의 뜻을 겸허하게 받아들이기로 결정한 것을 환영하는 바이다.

이는 오로지 민주화를 위하여 온 몸으로 싸워온 전 국민의 위대한 승리로서, 민족사에 길이 빛날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고 생각한다.

이제 정부, 여당은 시국수습 6개 항의 제안을 말로써만이 아니라 즉각 실천에 옮김으로써 국민에게 진실성을 보여주어야 할 것이다.

특히 구속자 석방, 수배자 해제 등 실천 가능한 사항은 지체함이 없이 즉시 실행되어야 한다.

우리 국민운동본부는 이와 같은 정부, 여당의 시국수습방안의 구체적 실천을 온 국민과 함께 예의주시할 것이다. 이제 민주장정의 첫걸음이 시작되었으며, 국민운동본부는 위대한 민주 승리의 그날까지 국민과 함께 전진할 것이다.”

1987. 6. 29.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


1987년 7월

1987. 7. 1. 전두환 '시국수습에 관한 특별담화'를 발표

전두환, 텔레비전과 라디오를 통해 '시국수습에 관한 특별담화'를 발표하여 6·29선언 8개항을 모두 수용, 후임 대통령에게 평화적으로 정권을 이양할 것임을 천명

 

1987. 7. 3. 이한열 군 사망.

국본, 이한열 추모 기간( ~11) 선포.

 

1987. 7. 6. 이한열 추모집회

서울지역 대학생 8000여 명, 연세대에서 이한열 추모집회 후 시위

 

1987. 7. 9. 이한열 군 영결식 거행

이한열 군, 영결식 거행, 시민·학생 1백만여 명, 서울 시청 앞 운집, 광화문 일대에서 시위

 

1987. 7. 21.

전국 28개대 교수 534, `민주화를 위한 전국교수협의회` 창립


1987년 10월

1987. 10. 27. 대통령중심 직선제 국민투표로 확정

대통령중심 직선제에 관한 새 헌법안, 국민투표로 확정. 찬성 93.1%

 

1987.11.20. ‘공정선거감시단발족

국본은 11월 말부터 대통령 선거에 조직적으로 대응하기 위해 각종 기구, 지역, 대학별로 공정선거감시단을 발족

 

1987. 12. 16. 16년 만에 실시된 대통령 직선제

학생과 시민은 학업과 생계를 밀쳐두고, 공정선거운동을 전개하여 16년 만에 이루어진 시민에 의한 대통령 직접선거가 부정과 모략으로 얼룩지지 않도록 감시하였음.

공정선거 감시단 소속 대학생 등 100여 명, 부재자투표함 밀반출을 적발하여 구로구청사 봉쇄하고 농성

공권력은 1216일부터 23일 동안 전개된 부정선거 항의 농성을 강제 해산시키면서 1,050명을 연행하고 105명을 구속시킴. 이 과정에서 하반신 마비 등 다수의 피해자가 발생.

많은 사람들이 노력에도 불구하고, 우려했던 것처럼 신군부의 일원이었던 노태우가 제13대 대통령으로 선출.

 

▷ 6월 민주항쟁 과정 일지를 정리하며

이 땅의 민주화는 시민들의 피와 땀과 눈물로 이루어 낸 것임을 다시 한 번 느겼습니다.

그리고...

전두환은 예나 지금이나 꼴보기 싫다!!!

 

 

참고자료

- 한국민주화운동사 연표,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연구소 편

- 우리는 결코 너를 빼앗길 수 없다. 김정남 지음.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 6.10민주항쟁 홈페이지(https://www.610.or.kr/)

-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홈페이지(http://www.kdemo.or.kr/)

- 사료로 배우는 민주화운동 홈페이지(https://contents.kdemo.or.kr/index.html)

- 오픈아카이브 홈페이지(https://archives.kdemo.or.kr/ma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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